대부분의 운동이 ‘0’에서 ‘1’을 더해가는 일이라고 치면 서핑을 ‘0’에서 ‘0.1’로 겨우 갔다가 ‘-3’으로 굴러떨어지는 일 같다. 근데 그 ‘0.1’이 미치도록 좋아서, 고작 파도 하나 타려고 몇 시간 동안 물살을 버티곤 한다. -11p |
첫 문장부터 미치도록 완벽하다. 이토록 완벽한 문장은 근 6개월 들어 처음이다. 이 문장에 공감하지 않을 서퍼가 과연 있을까?
올해 6월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발리에서 서핑하기'를 실현하기 위해. 발리를 찾았었다. 이때만 해도 내가 이렇게 서핑에 빠질 줄은 몰랐었지..
서핑의 'ㅅ'자도 모른 채 막연히 인스타에서 본 서핑의 낭만을 떠올리며 덜컥 한 달 동안 서핑을 배울 수 있는 서핑 캠프를 예약해놓고 발리에 가서 서핑을 탄 지 3일 만에 나는 후회를 했다. "이렇게 힘든 걸 내가 한 달 동안 버틸 수 있을까?"
서핑에 초보인 사람은 익숙하지 않은 서핑을 하기 위해 일정 거리의 바다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라인업'. 그 서핑을 해야 하는 '라인업'안으로 들어가려 하면 서핑보드 위에 누워서 초보자라면 뚫기 힘든 파도를 뚫고 나아가는 '패들링'이란 행위를 해야 했고. 파도를 뚫고 나갔어도 파도를 타고 일어나는 테이크 오프(Take off 서핑 보드 위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하는 것 또한 힘들었다. 그리고 행여 파도를 타고 나가는 테이크 오프란 행위를 하고 나면 다시 파도를 타기 위해 라인업을 들어오는 행동을 반복해야 했다. 이런 모든 파도를 타기 위한 행위는 평균 이상 수준의 운동량이 필요했고, 서핑에 대해 아무런 사전지식도 근육도 없던 내게는 그것이 취미라기보다는 가혹한 극기훈련으로 느껴졌다.
서핑은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진입장벽이 높은 스포츠 중 하나였고, 처음에는 '내가 돈 주고 이걸 왜 배우러 왔나'하는 자괴감을 이기느라 괴로웠다. 아닌 게 아니라 발리로 서핑 캠프를 오는 사람들은 이미 서핑을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사람이며, 서핑을 하다가 뭔가 안 되는 부분들을 더 레벨업 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서핑의 'ㅅ'자도 모르는 내가 와서 그들과 함께 서핑을 배우려 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레벨이 맞지 않아 실력이 늘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도 이미 비용은 지불했으니 어쩌랴. 이를 악물고 첫 2주 동안의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나도 어느 정도 서핑 근육이라는 게 붙었는지 그 이후로는 점점 서핑이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서핑은 진짜 이상한 스포츠다. 왜냐면 20개의 파도를 잡을 기회가 있으면 19개를 놓쳐도 그중 1개의 파도만 잡아서 잘 타면 미친 듯이 재밌다고 느껴진다. 19개의 파도를 놓쳤지만 그중 잘 탄 1개의 파도의 기억으로 파도를 다시 타고 싶어지는 묘한 매력이 있는 스포츠다 (아마 서핑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하지 않을까). 그렇게 발리에서 나는 서핑에 미치기 시작했고, 모든 서퍼라면 그렇듯 몇 개월을 바다에 미쳐서 파도를 기다리며, 일상생활을 잊고 파도만 기다리는, 서핑에 전념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서핑은 매력적인 스포츠인 동시에 나의 일상을 해치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스포츠다).
아무튼, 서핑을 하는 와중에 서핑을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생각했고, 서핑에 관련된 책을 읽으면 서핑을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란 마음에 서적을 뒤져보던 중 이 책을 발견했다. '서핑을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란 마음을 가지고 이 책을 펼쳐 봤을 때, 이 책의 첫 문장이 나를 사로잡았고, 앉은자리에서 이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책에는 서핑을 잘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고, 서핑을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담겨있다. 누구나 서핑을 처음 배우고 잘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을 한 번쯤은 겪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겪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핑에 대한 개인적인 나의 마음을 너무 잘 대변해 주는 책이어서 서퍼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서퍼가 아니더라도 서핑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읽으면 조금이나마 서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물론 서핑을 이해하고 싶다면 직접 바다에 나가서 부딪혀보는 걸 추천한다).
끝으로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생각하는 구절을 소개한다.
오래전 법정 스님의 “풍부하게 소유하지 말고 풍성하게 존재하라”는 말씀을 글로 읽고 과연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 오래 생각한 적이 있다. 스물의 나에겐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어려운 물음이었다. 그런데 그날 첫 서핑과 서프보드 위에서 처음 디뎌본 세계를 떠올리면 나는 답에 조금 가까우진 기분이 들곤 한다. 우리는 스스로 인식한 세계만큼 존재한다. 감각은 입력의 총량을 더 잘게 쪼갤 수 있을 때 고도화된다. 태어나 처음 경험한 에스프레소에서 느껴지는 건 쓴맛이 지배적일 테지만, 점차 경험이 누적되면 우리의 혀와 코는 신맛과 단맛, 바디감, 여러 계열의 향기를 구분해내기 시작한다. 감각하고 인식하고 움직일 때 나는 이곳에 존재하게 된다. 다시 첫 서핑을 떠올린다. 마치 파도가 지구의 공전과 자전을 따라 낱낱이 운동하고, 바다에 관한 단어가 수천 개로 방울방울 쪼개지는 것 같던 순간. -<아무튼 서핑> 중 |
무엇이 인간을 풍성하게 만드는가. 인간을 더 살아있게 만들고 인간을 더 살고 싶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경험이다. 서핑 또한 육지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을 선사한다. 그럼으로써 나를 더욱더 살아있게 만들고 더욱더 현재에 살아가고 싶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서핑은 현재를 살아가게 하는 경험이자 현재를 내가 살아있을 수 있게 하는 경험이지 않을까. 딱 그만큼 나는 서핑에 진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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