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와 지수. 아영과 이희수. 지수와 레이첼.
그립고, 다시 만나고 싶은, 그러나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린. 지구 끝의 온실에 관한 이야기.
알 수 없는 아주 미세한 나노 먼지 입자의 증식으로 인해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어버린 지구. 인류는 땅 위에 인공적인 돔을 만들어 연명해 보지만, 이미 자원이 유한한 돔 안에서는 하루라도 더 살아남기 위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학대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아비규환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다. 그마저도 더스트의 무한한 증식으로 수많은 돔 시티들이 무너져 결국 인류는 멸종위기에 처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더스트 내성을 가진 나오미와 아마라는 돔 시티 밖에 내성종들이 모여사는, 돔을 씌우지 않고도 자연적으로 식물들이 자라나는, 더스트의 피해가 전혀 없는 마을이 있다는 전설과 같은 얘기를 듣고 그곳을 찾아 나선다.
소설은 나오미와 아마라 자매, 레이첼과 지수가 등장하는 더스트 시대와 아영과 이희수, 그리고 노인이 된 나오미가 등장하는 더스트 이후 재건 후의 시대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식물학자인 아영이 해월의 모스바나 이상 증식 현상을 취재하게 되고. 어렸을 적 이희수의 정원에 피어있던 잡초 같은 풀에서 보이던 기이한 푸른빛이 해월에도 피어나는 것을 알게 되면서 모스바나에 관해 더욱 연구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기본적으로 멸망한, 혹은 멸망해 가는 세계관에 관심이 많은 편에 속하는 나는 이 책을 처음 보고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표지 또한 잘 뽑았다. 또한 소설의 세계관도 충분히 개연성 있고 과학적이다. 나오미와 아영, 아영과 이희수, 나오미와 지수의 이야기를 통해 전개되는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니 시간이 지나는 줄 모르고 다 읽어버렸다.
더스트 시대에 돔 시티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했다. 그렇게 그들이 모여서 형성한 공동체들은 모두 하나 같이 처음 설립될 때는 엄청 그럴듯하고 이상적인 집단인 듯 보이지만, 결국 얼마 못 가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서로의 이익만을 고집하며 모두가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돔 시티 내부가 이상적인 환경이었던 것 또한 아니다. 돔 시티는 그들의 생존을 위해 주변 생존자들을 학살했고, 자원을 독점했으며, 또 그 안에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학살했다. (만약 내가 더스트로 멸망한 세계에 살아남은 사람이었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돔 시티 내부도, 돔 시티 외부도, 그 어느 곳 하나 갈 데 없는 말 그대로 멸망한 세계에서 평화롭고 이상적인 공동체인 프림 빌리지는 나오미와 아마라, 지수, 레이첼, 대니,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영원히 지속되면 좋겠는 유토피아였다. 하지만 다른 모든 대안 공동체들과 같이, 프림 빌리지도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유토피아는 아니었고 결국은 더스트의 증가와 내, 외부의 상황에 의해 사라지고 만다.
나오미나 프림 빌리지를 벗어난 다른 공동체원 모두는 모스바나가 더스트를 약화시키는 식물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지수와의 약속만으로 지나치는 모든 곳에 식물들을 심으며 다녔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모두들 프림 빌리지를 그리워하고 있었고 그곳을 벗어난 이후에도 프림 빌리지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노력 덕분에 모스바나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전세계로 퍼져나간 모스바나는 더스트 종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멸망해서 좌절만이 남은, 비도덕과 폭력만이 남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공동체였던 프림 빌리지. 그리고 평화로웠던 그곳을 잊지 못해 그곳에 나와서도 평화로운 공간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나오미와 다른 사람들. 폭력과 범죄를 일삼는 디스토피아적 세계에서도 악순환을 끊고 선한 영향력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그것이 퍼지고 퍼져서 선한 파급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려주는 예가 아닐까.
불신과 부조리가 팽배한 현실에서 믿음과 희망으로 선한 영향력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 좋아. 나오미, 나도 네 생각에 동의해.” 지수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돔 안의 사람들은 결코 인류를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 타인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는 게 가능했던 사람들만이 돔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인류에게는 불행하게도, 오직 그런 이들이 최후의 인간으로 남았지. 우린 정해진 멸종의 길을 걷고 있어. 설령 돔 안의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더라도, 그런 인류가 만들 세계라곤 보지 않아도 뻔하지. 오래가진 못할 거야.”
나는 지수 씨가 동의해줘서 기뻤다. 하지만 그가 그다음으로 말한 것은 조금 뜻밖이었다.
“그래도 우린 식물들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야 해.”
“왜요?”
지수 씨가 짧은 침묵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많은 대안 공동체들을 봤어. 모두 같은 패턴이었지. 처음에는 거창한 가치를 걸고 모여. 유토피아 공동체를 표방하거나, 종교를 중심에 두기도 하고, 사냥꾼들이 모인 집단일 때도 있고, 그도 아니면 평화로운 생존을 바라는 사람들이 모이기도 해. 모두 돔 시티 안에서는 답을 찾지 못해서, 돔 시티 밖에서 대안을 꿈꾸는 거야. 하지만 그게 뭐가 됐든 결국 무너져. 돔 밖에는 대안이 없지. 그렇다고 돔 안에는 대안이 있을까? 그것도 아니야. 나오미 네 말대로 돔 안은 더 끔찍해. 다들 살겠다고 돔을 봉쇄하고, 한줌 자원을 놓고 다른 사람들을 학살하지.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멍하니 지수 씨를 보았다. 그가 나를 마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돔을 없애는 거야. 그냥 모두가 밖에서 살아가게 하는 거지. 불완전한 채로. 그럼 그게 진짜 대안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 똑같은 문제가 다시 생길 거야.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 뭔가를 해야 해. 현상 유지란 없어. 예정된 종말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을 계속해서 벌이는 것 자체가 우리를 그나마 나은 곳으로 이동시키는 거야.”
-2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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