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고 온 여름, 아직도 그 여름에 머물고 있는 마음에 대하여
어떤 소설은 너무 흡입력이 강해 다 읽고 난 후에도 한참 동안 그 세계관 속에서 헤메이게 된다. 현실과 소설의 경계가 무너져 내가 어느 곳에 속해 있는지 헷갈리게 만드는 그런 소설. 성해나 작가의 <두고 온 여름>이 나에겐 그런 소설이었다. 많지 않은 분량으로 2시간 남짓 걸려서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 편의 가름 아린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분위기가 떠오르는 소설이었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알 수 없는 먹먹한 감정에 사로잡혀 조용히 눈물을 흘렀다. 덕분에 카페에서 참을 수 없는 울음을 감추느라 애를 먹었다.(나이 서른 먹고 카페에 앉아 울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혹시라도 훌쩍이며 카페에서 눈물을 훔치는 머리 긴 남자를 본다면… 모른 척 해주길 바란다.)
사진관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아가던 고등학생의 기하. 어느날 아버지가 새로운 어머니와 같이 살 게 되면서 기하에게는 뜻하지 않은 가족이 생긴다. 새어머니와 8살 어린 남동생 재하. 기하는 갑자기 생긴 새어머니와 남동생 재하가 어쩐지 어색하기만 하다. 그런 기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어머니와 재하는 기하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기하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렇게 네 가족은 4년을 함께 하지만, 어느 날의 소풍을 계기로 그들은 영영 헤어지게 된다.
“저는 혈연관계가 아닌 이들이 가족이 되는 이야기를 주로 써온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을 쓰면서는 가족이 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는 이들도 있겠구나, 서로를 향한 이해를 시도로만 남기고 돌아보며 후회하는 이들도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153p)
성해나 작가가 스스로 <두고 온 여름>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이다. 이 소설을 설명하는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을 것 같다.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은 괜찮은 존재가 되어 줄 수 있었지만, 서투른 마음 때문에 결국 상처만 주고 뒤돌아서 후회를 남기게 되는 관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진짜 혈연관계로 맺어진 우리의 실제 가족에게서도 빈번하게 나타나는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또 굳이 가족 관계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향한 이해를 시도로만 남기고 돌아보며 후회하는 경험이 있었다. 그 포인트가 공감을 불러일으켜 이 소설에 흡입력을 만들어주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소설 속 기하와 기하의 아버지, 재하와 재하의 어머니는 모두 아직 성숙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우리를 상기시킨다. 그때, 조금 더 마음을 열었더라면… 그 때, 조금 더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은 어땠을까. 그땐 왜 그랬을까. 하며 후회하던 지난날의 못난 내가 떠올랐다.
마지막엔 주인공들 나름대로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두고 온 마음을 정리하는 형식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기하는 기하의 방식대로, 재하는 재하의 방식대로.
마지막 장에서 재하는 일본으로 넘어가 그만의 단출하고도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강아지와 산책하기도 하고, 새아버지 남겨준 DSLR을 가지고 사진을 찍으러 다니기도 한다. 그 장면을 통해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두고 온 여름날의 마음을 정리하고 평화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설이 끝난 후로도 계속해서 그만의 평화를 이어나갈 수 있기를 응원하게 된다. 소설 속의 기하는, 재하는 나를 떠올리게 만든다. 나도 내게 주어진 역할이 모두 끝난 어느 날엔가, 평화로운 결말을 맞이할 수 있게 되길 고대해 본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든 기하, 재하들을 응원한다.
무심코 넘긴 책장에서 과거에 두고 온 미련을 발견할 수 있었던 하루였다.
우리는 누구나 뜨겁던 한 여름의 어느 날, 무언가를 두고 왔다.
그 여름에 내가 두고 온 것은 너의 기억일까, 아니면 나의 기억일까.
한때는 내 곁에 있었지만 떠나간 이들을, 깨끗이 털어내지 못해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마음을 정리하며 이 소설을 썼다. -성해나
/...100일 프로젝트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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