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엔 너무 자기 계발 서적만 읽는 것 같아서 인문학적 감수성을 충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소설을 집어 들었다.
2024년도 역주행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정대건 작가의 <급류>다.
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계곡물이 불어나 급류를 만나 휩쓸려가버리는 것 같은 사건을 만나 어떤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지, 그 위에서 나도 같이 물살을 따라 떠밀려가듯 순식간에 소설을 다 읽었다. 그만큼 흡인력 있는 소설이다.
이야기는 저수지와 계곡이 유명한 지방도시 '진평'을 배경으로, 열일곱 살 동갑내기인 도담과 해솔의 만남을 그린 소설이다. 아빠와 함께 수영을 하러 갔던 계곡에서 물에 빠져 죽을 뻔한 해솔을 도담이 구한다. 그것을 계기로 타지에서 이사 온 해솔과 해솔의 엄마와 도담과 도담의 아빠는 점차 친해진다. 자연스럽게 도담과 해솔이 서로 연인 사이로 발전되어 가는 도중에 도담의 아빠와 해솔의 엄마가 불륜 관계인듯한 정황을 알게 되면서 사건은 급속도로 전개된다. 도담의 아빠와 해솔의 엄마가 불륜임을 확인하기 위해 어느 날 밤 은밀히 그들의 뒤를 밟던 해솔과 도담. 그들이 그 사실이 진짜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그날밤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날 이후, 해솔과 도담의 삶은 마치 급류를 만난 듯 순식간에 변해버린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사건은 '급류'처럼 휩쓸려와서 소용돌이치는 계곡이 '와류'를 일으켜 물속으로 끌어당기듯 다가왔다. 그리고 자그마치 12년이란 긴 세월동안 서로가 물속 깊은 심연에 가라앉은듯한 숨 막히는 불행의 감정을 느끼고 살아가게 만들었다.
두 사람에게 닥친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고 왜 그 두 사람에게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누구를 원망할 대상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불행한 사건일 뿐이니까. 그것은 그들이 벌을 받아 마땅해서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해솔이 훗날 소방관일을 하며 지켜봐 왔듯이, 누구는 말벌에 쏘여 죽기도 하고, 음주운전 사고를 낸 음주운전자는 멀쩡히 살아남고 아무런 죄가 없는 한 가족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것만큼이나 부조리한 사건일 뿐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불행이자 사랑인 사람들인 도담과 해솔. 그들은 서로가 공유하는 불행 속에서 마음껏 불행했고, 온 힘을 다해 사랑했다. 모진 풍파가 많았지만 진평에서의 사건도 결국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꺾을 순 없었다. 질긴 인연이 오히려 그들을 더 질기게 사랑하게 만들었다고 해야할까. 둘은 이미 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진평에서의 사건을 담담히 받아들인 그들은 이제 알고있다.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를.
"두 사람 앞에 파도가 일고 있었지만 그들은 수영하는 법을 알았다."
-311p
인생에 수많은 풍파가 찾아와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두렵지 않다. 두려운 사람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는 것에서 찾아오니까. 내 인생을 송두리째 변하게 할 급류는 되도록 피하는 것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이 물에 빠지게 되었다면 물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는지 아는 지혜와 행동력이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파도가 일고 있지만 수영하는 법을 아는 해솔과 도담처럼.
해솔이 도담에게 해주는 이야기로 끝을 맺어본다.
도담아, 누가 사랑이란 말을 발명했을까 궁금해했지.
매몰된 현장에서 눈이 감겨 오는데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기적적으로 너와 다시 만나서 너를 그리며 떠날 수 있어서.
그러다 내 이름을 부르는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 환청이었겠지만,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네가 기도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
반드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살겠다는 의지로, 널 다시 만나겠다는 의지로 그렇게 화염이 가득한 바닥을 필사적으로 기었어.
그때 생각했어. 누군가 죽기 전에 떠오르는 사람을 향해 느끼는 감정. 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랑이란 말을 발명한 것 같다고. 그 사람에게 한 단어로 할 수 있는 말을 위해 사랑한다는 말을 만든 것 같다고.
그때 깨달았어. 사랑한다는 말은 과거형은 힘이 없고 언제나 현재형이어야 한다는 걸.
-304p
'다양한 리뷰 > 책, 생각 정리함'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화로웠던,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그곳, 프림 빌리지를 추억하며. <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0) | 2024.12.31 |
---|---|
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 경제를 관망하라 <부의 인문학> 우석(브라운 스톤). (6) | 2024.11.11 |
바다 위의 또 다른 세상 <아무튼 서핑> 안수향. (3) | 2024.11.10 |
자본주의 시대에 우리는 무언가를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 <사는 동안 한 번은 팔아 봐라> 서 과장. (15) | 2024.11.09 |
어느 성 소수자의 사랑법.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2) | 2024.11.02 |
댓글